미국 뉴스타부동산

뉴스타부동산은 신뢰와 역사를 자랑하는 한인 최대의 부동산 회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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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들

안녕하십니까? 지금은 미국에 있습니다.

뉴스타★ 2012. 10. 19. 03:00
 
덥다 하고 땀을 식히던 시기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가을 바람이 시작 되었네요.
하늘은 가을만 높은 줄 알고 살다가 맨 날 높을수도 있구나 하는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산 지가 30년이 되어 갑니다.
참 세월이 빠르지요? 아침에 초등학교 갈 때 산에 뒷산에서 생기는 그림자로 시간을 아는 해시계를 보고 학교를 다녔는 정말 시골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차꼴에서 태어났습니다. 전기도 없는 호롱불에...
기름(석유) 많이 들어간다고 초저녁에 불을 끄게 강요하신 동네 훈장이셨는 우리 아버님 가정에 태어나서 초등을 졸업하고 읍으로 유학을 가서 처음으로 짜장면을 구경하고 먹어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라는 것도 책에서나 말로만 들었지 그때 십자가를 처음 보았습니다.
지난번 영화에서 분명히 죽은자가 다시 또 살아나서.... '영화'라는 것도 그 때 처음으로 보았답니다.
구공탄을 때는 방이 월세가 비싸다고 나무로 불을 때는 방을 구해서 두번이나 밥을 해야 하는 고통도 죽을 것 같은 어려움도 그 추위에 다 잊고 말았지요.
쌀이 없어서 보리쌀 먼저 재저서(쪄서) 그리고 다시 쌀을 조금 썪어서 밥을 해 먹을때가 13살 이었으니 지금 같으면 아동학대죄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지요?
그리고 의성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고등학교를 여기저기로 전전, 세학교 씩이나 고교동문을 만들었으니 지금보면 상당한 미래 지향적 정치 행보였다고 보는이도 있었습니다.
그 정치적 행보는 지금도 유효 하기에 남들보다 고교 동문이 세배나 많답니다.
어려움에서 일어서는 방법을 가르켜 드리려고 쉼없이 다니고 있습니다.
그 당시는 서울 영등포 한쪽 구석의 동양공전, 경북의 의성종고, 인천 선인고를 거쳐으며 우리 나라에서 졸업생이 제일 많다는 인천선인에서의 마지막 성적증명서는 60/60 이라는 자랑스런? 성적표를 들고 신의 사랑과 억지와 행운으로 서울 자양동에 있는 건국대 법대에 입학을 하였답니다.
입학과 동시에 71세가 되신 우리 아버님 주머니에 등록금이 없어서 1학기 마치고 해병대 지원입대를 해야 했습니다.
그 사이 음악 다방의 DJ 까지 몇개월 경험하고 드디어 1974년 1월7일날 해병대 266기로 입대 했답니다. 한 겨울에 진해 앞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정말 매섭고 살을 애는 듯한 찬바람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그 수심이 깊은 바다를 건너 탈영을 하려다 죽은 해병도 있었답니다.
그 추운 훈련을 그만하려고 자기 발목을 총으로 쏘는 우리 동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인간적이라 할수도 있겠지만 해병대는 그 발목없는 해병을 고쳐서 꼭 만기 전역시키고 했답니다.
남들은 거역하지만 남들은 피하려 하지만 남 자랑스런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해병대를 병장으로 만기 전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독서실에서 하루 16시간 이상 2년간을 꼬오박 공부를 했답니다.
그리고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열심히 공부를 했으며 그곳은 내겐 너무나 자랑스런 건국대학교 였습니다.
3학년 때 건대법대 학생회장을 거치고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으로 국가가 어수선 할 때 주택은행에 입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대학원 입학과 노동조합 창립해서 시대의 희생을 각오하는 또 한번의 전사가 되었답니다.
대학원 경영학과 졸업은MBA 입니다. 졸업과 동시에 박사라는 청운의 뜻을 가지고 도미했습니다.
도미! 그러나 공부는 개인의 영광이고 돈은 가문의 영광이다 라는 괴변적 한 소절을 남기고 4년동안 "미국의 청소부"로서 세계 최 일류국의 환경 미화원에 몸을 맡겼답니다.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 할 것 다 해 보았습니다.관념이 중요했습니다.
가난한 집안의 태생으로 가난한 국가에 해병대 말단 소총수 전역자가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어떤 일을 마다 하겠습니까?
인간이기를 거부하고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한 돼지처럼 주인을 위해 죽어야 하는 해병 이었답니다.
3년간 길러진 돼지, 그리고 주인이 원 할 때는 언제든 죽어 주어야 하는 써플라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해병이고 해병 정신이었습니다.
목숨을 버리는 훈련을 3년동안 하다가 나왔는데 무었인들 못하겠습니까?
그리고 청소로 잘 훈련된 남문기,드디어 평생을 함께 할 뉴스타 부동산회사를 1988년 9월에 설립했고 2000년도에 KBS에서 한민족리포트 1시간 방영된 "300달라로 이룬 남문기의 어메리칸 드림"은 또 한번의 힘이 되었습니다.
70여개의 뉴스타지사와 8개의 자회사를 거느리는 그룹으로 성장을 했었습니다.
미국에서 한국인 2.300명의 고용창출 기록했으며 수 조원의 매출을 기록하고100만 한인대표인 로스엔젤레스 한인회장과 미국 250만 을 대표하는 미국 한인회 총회장 지금은 750만을 리드하는 해외 한민족 대표자 협의회 의장이기도 합니다.
거기에다 미주한인상공회의소 총회장, 600여개가 있는 세계한인회장대회의장, 재미해병대전우회장,미주한인부동산협회 회장, 한미친선협회장, 미주동포후원재단 이사장등 수 없는 단체의 대표로 봉사를 했습니다.가끔 사람들이 추겨 세우는 문자로 표현 한다면 "아무나 쓸수는 없는 인간 신화 "남문기의 성공스토리" 이기도 합니다.

<1992년 4월 29일 LA폭동때 해병전우회 회장으로 뉴스타 부동산은 사흘동안 상황실이였다>

미국에 산지 29년만에 조국이 좋아 미국시민권 반납하고 한국에 입성 그러나 그것은 곧 쉼표로 돌아 왔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국과 미국을 잇는 가교 역할을 자임하는 이게 남문기 인생이구나 하고 금방 적응을 하고 아무일도 없었던 것 처럼 즐겁게 살고 있습니다. 생각 나는대로 써 본 한국 나이 60의 "남문기 대강 이력서"이기도 합니다. 밑에 링크는 이력서 입니다. 자세히 보아 주시면 더 친해 질수 있고 후원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남문기 그는 누구인가?'
http://nammoonkey.com/ebook/20120301/index.html

올해로 뉴스타 장학재단을 설립한지가 12년, 누구나 마찬가지로 뉴스타도 불경기의 터널을 어렵게 나오고 있습니다. 그 속에 12년동안 1.000여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왔다는 것이 자랑스럽기만 합니다.
어렵지요. 불경기가 우리 회사에만 온 것 같았지만 그래도 정직하고 깨끗하게 지금까지 했던 것 처럼 많은 이들을 도와 드리고 싶답니다.
그 학생들이 용기를 얻고 성장해서 또 다른 사람에게 장학금을 주고 그리고 그 학생들이 미국 대통령이 되었으면 하고 기도를 드린적도 있답니다.

<뉴스타장학금을 받은 학생들과 후원을 한 뉴스타 장학재단 이사님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며>
그리고 사는 방법을 공유하기 위해서 온 국민을 잘 살게 하기 위해서 남문기성공학 강의(How to succeed)하고 다닌지 15년에 넘었고 미국, 카나다, 영국, 중국, 일본 독일등 수십여개의 나라에서 했으며 논산훈련소와 해병대 사령부,서울시청공무원 교육원,
경기도청,경북도청,강원도청,대구교육청,많은 시군구청등과 CBS방송국, 서울대, 연세대, 건국대, 경희대,전남대,공주대,서울과학기술대, 강릉원주대, 창원전문대,성결대, 평택대, 서울여대,중앙대, 가평고,영월석정여고와 영월종고,의성중학등 400곳 이상에서 공무원 회사원 젊은 학생을 상대로 꿈과 비젼 변화와 혁신에 대해서 내 생각을 이야기 했다. 지금도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곳이 있으면 다른 스케쥴에 우선해서 강의를 해 드리고 있습니다.

아래에 이력서 링크를 살피시면 어떤 것으로 강의를 하나 참고로 할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5개의 웹 싸이트 www.newstarrealty.com , 7개의 블러그,120.000명의 팔로워를 가진 트위터 www.twitter.com/nammoonkey 와 페이스북 www.facebook.com/nammoonkey 친구 5000명에 우리 뉴스타직원들이 100여명이 5.000명의 친구를 가지고 있으며 300여명이 1.000명이상의 친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에 카카오친구가 한국과 미국에 3.000여명이며 카카오스토리 500명에 개인적으로 만나서 교환한 이멜 주소가 35.000여명 이니 가히 방송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랍니다.
이것을 통해서 친 해지고 전달하고 영향을 주고 같이 살아가는 이야기도 한답니다.
더 많은 분들이 여기저기에 인간 네트웍이 형성되기를 바랍니다.


<로스엔젤레스 한인축제에 한인회장으로서 타인종과 함께 퍼레이드에 참여하다>

누구나 가진 인맥이지만 LA한인회장에서 부터 수 많은 단체장을 거치면서 만들어 졌다고 볼 수 가 있습니다. 미국 정치인을 포함해서 한국인들의 LA방문은 또 하나의 끈으로 보기에 충분합니다.
아무리 큰 도시 시장이라해서 국회의원들이 한해에 100명이상 방문하는 것은 없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LA는 다릅니다.
국회의원 도지사 시장을 포함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대표하는 분등 모든이가 즐겨 찾는 곳이 LA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감사장 공로장등 상장을 드린것만도 4.000장을 상회하며 제가 보관하고 있는 정리된 사진만 80.000장이 넘습니다.
그 80.000장은 앞으로 역사적 중요한 자료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다음 링크에는 저의 이력서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잘 만들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제 컴퓨터 시대에 맞도록 해 보았습니다. 방송 동영상과 신문 잡지 기사들 때문에 아마 3일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보고 좋으면 자기것도 한번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대강 이력서는 Http://nammoonkey.com/resume/resume_2012.html 에서 보실 수 있고 또 다른 방법으로는 삼성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분은 Play 스토어에 가서 ‘남문기’앱을 다운 받아서 인스톨을 하신 후에 핸드폰에서 아이콘을 실행하시면 되고 아이폰은 브라우저에 m.nammoonkey.com 을 입력하시고 이동하시면‘남문기’앱을 보실 수 있습니다. 한번 하셔서 많이 홍보 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6월9일날은 아들보다 귀엽다는 손자가 태어났답니다.
저의 나이가 53년생 뱀띠 계사생, 생각은 젊고 뭐든지 뒤지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한국 나이는 벌써 60이랍니다. 사실 이 모든것 뒤에는 내겐 훌륭한 멘토가 있었습니다.
친형님이시고 행정고시 6기인 '남인기' 형님등 많은 분들이 계셨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분은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대대로 내려오는 가문에서 배운 것은 디그니티(Dignity)와 로얄티(Loyalty) 다시 말하면 의리와 품위 명예 헌신입니다. 건강과 행운을 기원합니다. 열심히 노력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