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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큰형님과 막내아우

뉴스타★ 2008. 3. 11. 03:03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의 ‘고시 패스’는 어떤 의미일까. 시골 마을에서는 일대 사건으로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1968년, 내 장형인 인기 형님이 행정고시(6기)에 합격을 했다. 서울대에 합격했을 때에도 마을의 경사였으나, 고시 합격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의성중학교 교장선생님은 물론이고, 의성 군수, 의성 경찰서장이 우리 집까지 와서 경례를 아버님께 하며 축하인사를 했을 정도였다.
어릴 때 형님의 고시 합격은 내 자존심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었다. 우리 집안 직계는 물론 우리 마을의 자랑거리였으며 특히 동네 인근에 집성촌을 형성해 살고 있던 ‘영양 남씨 이계 할아버지’ 자손 전체의 경사이기도 했다. 요즘 말로 치자면 ‘가문의 영광’이었던 셈이다.
한의원을 운영하던 아버지를 고스란히 빼닮은 큰형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새벽같이 일어나 학교로 향했던 ‘바른 생활 모범생’이었으며 부모님의 입장에서도 ‘입 안의 혀’ 같은 존재였다고 본다. 부모님이 시키는 일은 뭐든지 거역하는 경우가 없었다. 밥은 꼭꼭 씹어 먹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씀에 따라 입 안의 음식은 반드시 스무번씩 씹고서야 삼킨 아들이었다.
형님은 내 인생에도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남문기 신화’가 만들어진 데는 부모님이나 다른 형님들의 성원과 가르침도 큰 도움이 됐지만 큰형님의 영향이 가장 결정적이었다. 어떻게 보면 내 인생 전체가 형님의 기획대로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공부는 대처에서 해야 한다며 나를 서울로 불러들여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마치게 해준 분도 큰형님이었고, 대학을 졸업한 후 은행에 입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했던 분도 큰형님이다. 또 은행을 다니다 미래가 보이는 것 같지 않아 고민하고 있을 때 더 넓은 세상인 미국에 가서 더 큰 비상의 날개를 펼쳐보라며 용기를 주었던 이도 바로 큰형님이었다.
내가 형님의 화려한 이력이나 냉철한 판단력 때문에 존경하는 것이 아니다. 형님은 한평생 엘리트 코스만을 밟았으면서도 단 한 번도 오만이나 거드름을 피우는 모습을 내게 보인 적이 없다. 항상 따뜻한 가슴으로 세상을 대했다. 엘리트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인 자신보다 못난 것에 대한 쌀쌀맞음이나 냉소적인 분위기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속이 바다만큼 넓고 깊은 사람이어서 나는 진심으로 큰형님을 존경한다.
만약 내가 큰형님이고 큰형님이 나였다면 나는 형님처럼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마 포기했을 것이다. 학교에서 싸움질을 하는 등 온갖 말썽을 피우는 사고뭉치 동생을 형님은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다. 입술이 터지고 머리가 깨져 들어오는 동생의 뒤치다꺼리를 해주며 상처를 싸매 주었다.
내 형님이라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참 바르게 살아온 사람이다. 국립극장 극장장과 문화부 정책 관리실장까지 올랐다가 지난 2000년에 정년 퇴임했는데, 퇴직할 무렵 문화부와 관련된 수많은 관변단체나 이익단체 자리가 있었음에도 고사했다. 양반은 진퇴가 분명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마지막 순간까지도 잊지 않고 실천한 것이다.
큰형님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그가 걸어온 길을 가리켜 엘리트 코스만을 밟았다고 한다. 형님을 보면서 진짜 엘리트란 혼자만 앞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뒤에 처진 사람을 격려하고 부추겨 함께 나아가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요즘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난관에 부딪히거나 고민에 빠질 때마다 나는 형님들에게 전화하는 버릇이 있었다. ‘형님! 이럴 땐 어떻게 하죠?’그러나 그 형님은 이미 가셨다.
형님에 비하면 많이 모자랐으나, 나 역시 어려서는 공부를 제법 잘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특히 못 말리는 개구쟁이였지만 그럼에도 내가 다닌 초등학교에서는 공부로 나를 따라올 만한 아이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사실 집안의 학문도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 나라별 아이들의 아이큐를 조사해보니 한국, 일본, 중국, 싱가포르 등의 아시아 국가가 상위 4위까지를 차지했다는 조사가 있었는데, 나는 그게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나라들은 모두 학문하는 것을 가장 높이 평가하는 유교 윤리가 몸에 밴 나라들로 핏속에 공부하는 머리가 녹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우리 집안도 그런 영향이 컸던 듯하다. 어쨌든 그러한 집안 내력으로 인해 우리 집은 늘 공부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예외 없는 법칙은 없으며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 하지 않던가. 내게 인생 최초의 시련이 닥쳐왔다.
중학교 입시 낙방! 당시는 중학교도 입학시험을 치를 때였는데, 나는 변명의 여지가 없이 낙방했다. 내가 지원한 학교는 의성군에서 가장 좋다는 의성중학교였다. 사실 내가 중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지리라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개구쟁이이긴 하지만 그래도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공부도 제일 잘하는 편이었다.
또 고시 공부하는 형님에게 붙잡혀서 나름대로 입시 공부를 했고, 곁에서 가르쳐 온 형님도 서울의 명문 중학교에 원서를 내라고 권했을 정도였다. 부모님이 서울에서 공부시킬 형편이 안 된다고 극구 말려서 하향지원을 한 셈이었는데 청천벽력 같은 불합격 통보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차골에서 수박서리, 닭서리를 하고 소꼴을 먹이러 다니며 유지한 상위권은 읍내에서 입시 과외를 받아가며 공부했던 아이들과는 기초에서부터 차이가 났을 것이다. 중학교 입시 낙방은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해주었다. 꼬박 1년을 맘고생 하며 재수를 한 끝에 결국 의성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이 때의 일은 나에게 이를 악무는 계기를 마련해 준 최초의 사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제 겨우 알아가고 있다. 그때의 시험 낙방도 기나긴 인생으로 보면 잠깐 지나가는 소나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험란한 여정이 그 뒤에 예비돼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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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기
<뉴스타 부동산 대표>